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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러닝머신

by 내쉐샹 2023. 11. 26.

  지루하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생각을 요즘엔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시작한 헬스. 러닝 머신에 올라 걷고 뛰는데 시간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왜 중요하냐면 10분 동안 타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원래 멍을 잘 때리는 성향인데 멍을 때려도 이상하게 시간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눈을 감는다. 고개를 살짝 든다. 그러는 동안 머신에서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에 나름의 안전장치를 한다. 양쪽에 머신의 몸체를 잡는다. 거기에 있는 조립 이음새에 검지를 그곳에 가져다 댄다. 그러면 뒤로 밀리는지 감지할 수 있다. 준비를 모두 마쳤다. VR을 켰다.

  여기는 6층이다. 창문 너머에는 비슷한 높이의 건물이 있다. 일단 그쪽으로 간다. 그런데 러닝머신에 경사를 설정해 두어서 대각선 위로 올라간다. 너머 건물의 위까지 올라왔다. 오우. 실감나게 무섭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래도 괜찮다. VR이니까.
  허공답보를 하듯이 계속 하늘을 오른다. 산행을 하듯이 걸어 올라가고 마침내 대기권을 돌파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도시의 모습이었다가 이제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됐다. 이쯤 오니까 충분히 했다 싶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긴다.

  이번에는 등산 코스다. 경사가 제법 있는 비탈길이지만 흙길이 제법 매끄럽게 잘 돼 있어 오르기가 좋다. 길의 폭은 한 사람이 겨우 갈 수 있다. 양쪽에는 수풀이 무성하다. 청설모가 바닥의 수풀과 나무를 간지럽히는지 수풀 이곳저곳과 가지들이 머리를 흔들 듯 이따금씩 출렁거린다. 수풀 사이로 꽃사슴이나 고라니가 보일 것만 같다. 저어기 분홍색 꽃이 있다. 그 뒤로 무언가...멧돼지 비슷한 형체가 있다. 무섭긴 하지만 우리에게 관심은 없다. 다행이다. VR이지만 그래도 무섭고 긴장된다. 조심스럽게 산길을 오른다.

  공기가 좋다. 잎들 사이로 뿜어져 나오던 햇볕이 어느덧 양편의 나무 사이 정중앙에 구의 형태로 놓인다. 나무의 호위를 받는 듯도 하고 내가 땅의 오솔길을 걷듯이 태양도 하늘에 난 오솔길을 걷는 듯도 하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데 저 태양은 또 내 발걸음을 따라 걷는 듯하여 경이로운 근사함을 느낀다. 그렇게 수풀 사이를 지나자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마음이 상쾌해졌다. 눈을 떴다. 다시 머신 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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