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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니체> 서평 - 당신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by 내쉐샹 2023. 12. 8.

  <마흔에 읽는 니체>는 자신의 세상을 재창조하게 만드는 책이다. 어떤 말이나 글, 행동에는 사상이 담겨 있다. 사상의 조각들을 발견한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담아 적절한 위치에 끼워맞추기도 하고 다듬어 재창조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다시금 살펴보고 조각들의 의미를 생각해보면서 나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누군가의 사상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경험이었다. 매우 귀한 경험이었다. 사랑니가 새롭게 날 때 치열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삶이 흔들렸다.


아모르 파티~♬

  가수 김연자님의 노래 제목이다. 신나는 노래의 비트는 가슴을 움찔움찔하게 한다. 아모르 파티의 의미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amor: 사랑, fati: 운명) . 이는 니체의 핵심어 중에 하나다. 이 글에서는 니체의 사상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나누고 싶다. 니체의 사상은 매우 어렵고 난해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니체의 사상을 내면 깊이 음미하며 즐겁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마흔에 읽는 니체> 덕이다. 저자는 니체 전문 해설자처럼 니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고 해설해 준다. 군더더기 전혀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전달하는 문장이 꼭 니체스럽다. 그래서 감상의 원천은 니체지만 그 통로는 <마흔에 읽는 니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래의 감상을 통해 이 책이 매우 좋은 책이며 내 삶의 커다란 변화를 준 책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서평을 쓴다.


"당신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는가?"

  니체는 묻는다.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부모님을 사랑하는가?"와 맥락이 비슷하다. 당연한 지점을 새삼 묻는다. 이런 질문은 일상에 한걸음 떨어져서, 또는 들어서서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부모님'에 관련된 후자의 질문보다 전자의 질문이 더 그렇다. '부모'보다도 더 가까운 '나'를 사랑하는지를 묻는 듯한 지점에서도 그러하지만 '나'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그러한가?'라는 질문이 재기된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해보더라도 명확한 기준이 없어 막연함에 놓인다. 니체는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와 삶의 방향을 제시했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 기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신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당신의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니체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세상에 산다.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존재들을 모두 같지만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같은 햇볕을 쬐면서도 감사할 수도 짜증이 날 수도 있다. 하찮은 인형도 누군가에겐 의미 있는 인형이 될 수 있다. 타인의 운전 습관이 누군가에겐 거슬릴 수도 있고, 동일한 사람이라도 좋거나 싫을 수 있다. 세상에는 자신만의 기쁨과 슬픔들이 존재한다. 기쁨이 많은 사람은 삶이 즐겁고 슬픔이 많은 사람은 삶이 힘들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세상을 기쁨으로 채워야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 니체, <즐거운 학문>에서

  세상을 기쁨으로 채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이전보다 세상을 아름답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기쁨은 늘어날 것이다. 햇볕을 따뜻하게 느끼고 작은 일에 감사하는 일은 삶을 기쁨으로 채우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필연적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사물과 사람과 사건들은 모두 필연적이다. 필연적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듯이 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그러한 필연적임은 우연과 필연을 규명할 수 없는 미지의 통로를 거쳐 드러난다. 그렇기에 그 순간을 순간의 선택 또는 우연으로 여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필연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세상이 필연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부정적인 마음은 힘을 잃을 것이다. 당연한 일은 저절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빈대는 잡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빈대를 잡으려 애쓰다가 집을 다 태우게 된다는 말이다. 마음도 비슷하다. 누군가를 비난할 때의 우리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날카로움, 불타오름, 불에 휩싸임' 등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한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러나 비난이 시작되면 마음의 초원에 불씨가 붙어 금세 큰 불이 되고 우리는 큰 불에 휩싸이게 된다.
  거칠게 운전하는 사람,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 등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난을 하며 마음에 불을 피운다. 마음에 슬픔의 영역이 커진다. 그런다고 상황이 변화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어온 빈대를 잡으려 불을 지르게 된다. 그렇게 내 세상은 한동안 불길에 휩싸인다. 니체는 "눈길을 돌리는 것이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마음을 들이지 않음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는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면 무엇이 좋을까? 사실 그 자체로 좋기는 하다. 마음이 기쁘다. 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은 좋은 삶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


"너 스스로가 되어라"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말 중 하나이다. 나는 이미 나인데 왜 스스로가 돼라고 했을까? 우리는 무엇도 모른 채 태어났다. 그 무엇에는 '나'도 포함된다. 사실 '나'를 알기가 가장 어렵다. 타인에 대해서는 알 만큼만 알면 된다. 또한 관찰해서 보고 느껴지는 만큼 저절로 알게 된다. 하지만 타인은 '나'만큼 깊이 알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관찰하기도 타인에 비해 훨씬 어렵다. 생각보다 자신을 알기가 어렵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깊이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스스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보다 아는 것이 없다. 알다가도 모른다. 과거엔 바보같았고 오늘도 어느 미래의 시점에서는 또 하나의 바보일 예정이란 걸 알고 있다. 그렇게 보면 미래로 갈수록 '진정한 나'에 가까워진다고 볼 수 있다. 부딪히고 실패하고 깨닫고 나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간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되고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며 '진정한 나'에 가까워진다. 손흥민, 오타니, 유재석 등과 같은 사람이 박수를 받는 이유는 그 분야에서 굉장히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임은 물론이고 동시에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가꿔 각자의 색깔을 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가 되어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도 음악, 게임, 재미, 운동 등 특정 분야에 몰입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들이 찾은 스스로의 모습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나를 찾는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는 과정, 숨어있던 힘을 되찾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과 힘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당신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는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라'는 말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나 답은 쉽게 하기가 어렵다. 삶을 사랑한다면 지금의 순간을 내팽개치지 않을 것이다. 잠깐의 안락을 넘어서는 게으름과 나태를 내 몸에 새기지 않을 것이다. 몸을 침대에 눕히고 끝없이 지니를 갈구하는 램프의 노예처럼 핸드폰을 램프삼아 종일 어루만지고 자신이나 타인이나 세상을 비난하면서 영혼을 썩게 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순간만을 살고 있다. 니체는 모든 순간은 죽음 이후에 다시 똑같이 반복될 삶의 순간들이라고 하며 영원회귀 사상을 제시한다.
  실제로 '인간은 영원회귀한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가정을 하고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통해 우리 삶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극단적 허무주의이다. 순간을 포함한 삶 전체가 죽음 이후에 똑같이 반복된다는 사실, 지금 이순간도 과거에 반복된 삶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지점에서 영원회귀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영원히 회귀할 존재라고 생각함에도 이 순간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며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고 한다면 얼마나 위대하고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한 존재를 니체는 초인이라고 했다. 허무주의를 극복한 초인이 된다면 우리는 초인이 된 기쁨보다도 한 번뿐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자로서의 기쁨과 충만함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최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여러 가지 경험이 누적되다보면 한 번씩 깨달음을 얻게 되는 때가 누구나 있다. 나는 책을 통해서 때를 앞당기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고 이 책은 내 삶을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을 생동하는 삶으로 재창조하였다. 나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가 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질문에 주저함 없이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 당신은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흐름
-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 - 비난
- 힘에의 의지 : 초인
- 너 스스로가 되어라
+영원회귀의 구현
허무주의
사랑의 블랙홀

누군가의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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